"8월 15일은 그냥 쉬는 날 아닌가요?" 매년 돌아오는 광복절, 태극기를 게양하고 하루를 쉬지만, 그날의 진정한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본 적 있으신가요? 혹시 '광복'이라는 단어의 뜻을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거나, 일제강점기 35년의 설움을 막연하게만 느끼고 계셨다면 이 글이 당신의 궁금증을 완벽하게 해결해 드릴 것입니다. 단순히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이라는 표면적인 의미를 넘어, 우리 민족이 되찾은 빛과 그날을 위해 스러져간 수많은 영웅들의 피와 땀,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무게를 함께 느껴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신다면, 다가오는 광복절은 당신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입니다.
광복절의 뜻: 단순히 '해방'이 아닌 '빛을 되찾은' 이유가 뭔가요?
광복절(光復節)은 단순히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에서 벗어난 '해방(解放)'의 날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핵심은 '빛을 되찾았다'는 뜻의 '광복(光復)'에 있습니다. 여기서 '빛'은 국권과 주권을, '복'은 원래의 상태로 돌아옴을 의미합니다. 즉, 광복절은 우리가 빼앗겼던 나라의 주권과 빛나는 역사, 민족의 정신을 온전히 되찾았음을 선포하는 날입니다. '해방'이 외부의 힘에 의해 주어진 수동적인 느낌을 준다면, '광복'은 우리 민족의 끈질긴 독립투쟁과 희생을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빛을 되찾았다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0년 넘게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하고 강의하며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을 만나왔습니다. 그때마다 제가 가장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 '광복'과 '해방'의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입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광복절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했기 때문에 우리가 '해방된' 날로만 알고 계십니다. 물론 연합국의 승리가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는 광복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퍼즐에서 마지막 한 조각일 뿐입니다. 그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기까지, 35년간 이어진 우리 민족의 처절하고도 위대한 독립투쟁이 없었다면 '광복'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어둠의 35년: 우리가 빛을 잃었던 시간
광복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가 무엇을 빼앗겼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는 우리 민족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습니다. 단순히 영토와 주권을 빼앗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 이름과 언어: 창씨개명을 통해 우리 고유의 이름을 버리고 일본식 이름을 쓰도록 강요받았고, 학교에서는 우리말과 글의 사용이 금지되었습니다. 민족의 혼이 담긴 언어를 빼앗는 것은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가장 악랄한 정책이었습니다.
- 역사와 문화: 일본은 식민사관을 주입하여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폄하했습니다. 단군 신화부터 이어져 온 유구한 역사를 깎아내리고, 한국인은 스스로 발전할 수 없는 열등한 민족이라는 인식을 심으려 했습니다. 또한,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하고 훼손하며 우리 문화의 뿌리를 흔들었습니다.
- 경제적 수탈: 토지조사사업이라는 명목 아래 전 국토의 40%에 달하는 토지를 강탈했고,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생산된 쌀의 대부분을 일본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우리 민족은 자신의 땅에서 굶주려야 했습니다.
- 인적 수탈: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수많은 청년이 강제 징용으로 전쟁터나 탄광으로 끌려갔고, 어린 소녀들은 일본군 '위안부'라는 이름 아래 끔찍한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했습니다. 이는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반인륜적 범죄였습니다.
이 35년은 우리 민족에게 그야말로 '빛을 잃은' 암흑의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어둠 속에서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빛을 되찾기 위한 투쟁: 꺼지지 않은 불꽃
암흑 속에서도 우리 민족은 독립이라는 빛을 되찾기 위해 국내외에서 처절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 의병 활동과 3.1 운동: 국권 피탈 직후부터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일제에 맞서 싸웠습니다. 1919년 3월 1일, "대한 독립 만세"의 외침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며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비록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3.1 운동은 독립운동의 거대한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3.1 운동을 계기로,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독립운동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그 결과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외교 활동, 군사 조직(광복군 창설), 독립 자금 모금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광복의 그날까지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특히,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민주공화제를 채택함으로써 오늘날 대한민국의 법통이 되었습니다.
- 무장 독립 투쟁: 만주와 연해주 등 국외에서는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 등 빛나는 승리를 거두며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열악한 무기와 보급 상황 속에서도 오직 조국 독립이라는 일념 하나로 싸웠던 독립군들의 희생은 광복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전 세계에 우리의 독립 의지를 다시 한번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국내의 저항: 국내에서도 학생들의 광주학생항일운동, 신간회 활동 등 다양한 형태의 저항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또한 수많은 지식인과 교육자들은 우리말과 역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노력했습니다. 조선어학회의 우리말 큰 사전 편찬 노력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처럼 '광복'은 1945년 8월 15일 하루의 사건이 아니라, 35년간 이어진 끈질긴 저항과 희생이 쌓여 이뤄낸 위대한 성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해방'이 아닌 '광복'이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 선조들의 주체적인 노력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입니다.
8월 15일, 그날의 역사적 재구성: 광복은 어떻게 우리에게 왔나?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선언은 라디오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한반도는 35년간의 길고 긴 암흑에서 벗어나 감격적인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이 역사적인 순간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광복으로 가는 길은 치밀한 국제 정세의 변화와 그 속에서 빛을 발한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외교적, 군사적 노력이 맞물려 이뤄진 결과물입니다. 마치 잘 짜인 교향곡처럼, 여러 요소가 절묘한 순간에 어우러져 '광복'이라는 클라이맥스를 완성한 것입니다.
역사학자로서 저는 사료를 통해 그날의 긴박했던 순간들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오랫동안 해왔습니다. 단순히 '일본이 항복해서 광복이 되었다'는 단선적인 이해를 넘어, 그 이면에 숨겨진 복잡한 과정들을 들여다볼 때 비로소 우리는 광복의 진정한 무게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한 가지 사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지자체의 광복절 기념행사 자문을 맡았을 때, 저는 행사 기획자들에게 "광복을 맞는 서울의 모습을 시간대별로 재현해보는 것은 어떨까요?"라고 제안했습니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만세 부르고 태극기 흔들면 되는 것 아니냐"던 반응이, 카이로 선언부터 포츠담 선언, 일본의 항복 조짐, 그리고 8월 15일 당일 아침의 긴장감과 정오의 환희, 그리고 그 이후의 혼란까지 이어지는 스토리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자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이처럼 역사의 디테일을 아는 것은 현재를 이해하는 깊이를 더해줍니다.
광복으로 가는 길: 국제 정세와 우리의 노력
광복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을 국제사회가 '약속'하게 만든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끈질긴 외교적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 카이로 선언 (1943년 11월):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미국, 영국, 중국의 정상이 이집트 카이로에 모였습니다. 이 회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적 노력이 첫 결실을 봅니다. 바로 "한국인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로 만들 것을 결의한다"는 내용이 선언문에 명시된 것입니다. 이는 연합국이 최초로 한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약속한 문서로, 우리 독립운동사에 있어 엄청난 쾌거였습니다.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끊임없이 연합국을 상대로 외교전을 펼친 결과물이었습니다.
- 포츠담 선언 (1945년 7월): 독일의 항복 이후, 미국, 영국, 소련의 정상은 독일 포츠담에 모여 일본의 항복을 촉구하고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이 선언에서 "카이로 선언의 모든 조항은 이행되어야 한다"고 재확인함으로써, 일본이 패망하면 한국이 독립한다는 원칙을 다시 한번 천명했습니다. 이는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과도 같았습니다.
-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와 원자폭탄 투하 (1945년 8월):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묵살하자,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습니다. 동시에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일본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리는 결정타가 되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운명의 그날
일본의 패망이 기정사실화되자,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움직임도 바빠졌습니다. 특히 국내에서는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동맹이 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 새벽의 긴장감: 8월 15일 새벽, 일본이 곧 항복할 것이라는 소문이 서울 시내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일제가 마지막 발악을 할 수 있다는 긴장감도 감돌았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치안 유지를 명목으로 삼엄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 정오, 희망의 목소리: 마침내 정오, 라디오를 통해 히로히토 천황의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알아듣기 힘든 일본어였지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는 내용임이 알려지자 거리는 순식간에 함성으로 뒤덮였습니다.
-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인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거리로 뛰쳐나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35년간의 설움을 토해냈습니다. 숨겨두었던 태극기가 창문마다 내걸리고, 서울의 거리는 거대한 태극기의 물결로 넘실댔습니다.
- 서대문형무소의 해방: 그날 오후, 독립운동가와 사상범들이 갇혀 있던 서대문형무소의 문이 열렸습니다. 옥중에서 광복을 맞은 애국지사들은 마중 나온 시민들의 환호 속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광복의 기쁨은 잠시였습니다. 기쁨의 환호성 뒤에는 새로운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미군과 소련군에 의한 남북 분할 점령과 이념 대립이었습니다. 이는 광복의 불완전성과 함께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는 씨앗이었습니다. 따라서 8월 15일을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기쁜 날을 기념하는 것을 넘어, 완전한 통일과 진정한 의미의 '광복'을 완성해야 하는 우리의 과제를 되새기는 일이기도 합니다.
광복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태극기 게양법부터 기념행사까지)
광복절을 의미 있게 보내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실천은 바로 '태극기 게양'입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태극기를 다는 위치나 시간, 올바른 게양법에 대해 헷갈려 하십니다. 광복절과 같은 경축일에는 깃봉과 깃면의 사이를 떼지 않고 위로 올려 다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는 현충일 등 조의를 표하는 날에 깃면의 너비(세로)만큼 내려 다는 '조기'와는 명확히 구분됩니다. 또한, 광복절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다양한 기념행사에 직접 참여하거나 온라인으로 함께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저는 지난 10여 년간 역사 교육 현장에서 활동하며, 지식으로서의 역사를 넘어 '삶으로 살아내는 역사'를 강조해왔습니다. 특히 자녀를 둔 부모님들께는 광복절에 꼭 아이와 함께 태극기를 달아보시라고 권합니다. 단순히 "오늘은 광복절이니 태극기를 달아야 해"라고 말하는 것과, 아이의 손을 잡고 태극기를 함께 달며 "이 태극기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분들이 희생하셨는지 아니?"라고 이야기해주는 것은 아이에게 전혀 다른 경험을 선사합니다. 실제로 제가 진행했던 한 가족 역사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아버님은 "아들과 함께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하고 집에 돌아와 태극기를 다는데,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하고 태극기가 달리 보였다"는 소감을 전해주셨습니다. 이처럼 작은 실천 하나가 광복절의 의미를 우리 삶 속으로 가져오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올바른 태극기 게양법: 이것만은 꼭 지키세요!
국경일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것은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행동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잘못된 방법으로 게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래 내용을 꼭 숙지하여 올바르게 태극기를 게양합시다.
- 게양일: 8월 15일 (광복절)
- 게양 시간: 가정에서는 보통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게양합니다. 24시간 게양도 가능하지만, 심한 비나 바람 등으로 국기가 훼손될 우려가 있을 때는 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 게양 위치:
- 단독주택: 대문의 중앙이나 왼쪽에 게양합니다.
- 아파트 등 공동주택: 각 세대의 난간 중앙이나 왼쪽에 게양합니다.
- 게양 방법 (경축일):
- 깃봉과 깃면 사이를 떼지 않고 끝까지 올려서 게양합니다.
- 조의를 표하는 현충일, 국장 기간 등에 깃면의 세로 너비만큼 내려 다는 '조기(弔旗)'와 헷갈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전문가의 팁] 낡거나 훼손된 태극기는 어떻게 하죠? 오염되거나 훼손된 태극기는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는 국기에 대한 예의가 아닐 뿐더러, 대한민국의 상징을 존중하는 마음과도 연결됩니다. 각급 지방자치단체 민원실이나 주민센터에 설치된 '국기 수거함'에 넣어주시면 안전하게 처리됩니다. 이제 낡은 태극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지 마세요.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념행사 및 활동 추천
단순히 집에서 하루를 보내기보다, 광복의 의미를 직접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활동에 참여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 정부 공식 기념식 참여: 매년 정부 주관으로 광복절 중앙경축식이 열립니다. TV나 온라인을 통해 생중계되므로, 집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시청하며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습니다. 대통령의 경축사를 통해 그해 정부가 광복절에 부여하는 의미와 정책 방향을 엿보는 것도 중요한 관전 포인트입니다.
- 독립기념관 및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방문:
- 천안 독립기념관: 우리 민족의 시련과 국난 극복의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는 곳입니다. 7개의 전시관을 차례로 둘러보며 일제강점기의 실상과 독립운동의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특히 광복절을 전후해서는 특별 전시나 다채로운 문화 행사가 열리니 미리 확인하고 방문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이곳은 단순한 전시관이 아닙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실제로 고문당하고 순국했던, 역사의 아픔이 서려 있는 현장입니다. 차가운 감옥 복도를 걷고, 좁은 독방을 들여다보며 자유와 독립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조금 무겁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 어떤 교육보다 강렬한 역사의 울림을 선사할 것입니다.
- 지역별 기념행사 및 유적지 탐방:
- 보신각 타종 행사: 3.1절과 광복절에는 서울 보신각에서 타종 행사가 열립니다. 독립운동가 후손 등 각계 대표들이 참여하는 이 행사는 광복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의미 있는 자리입니다.
- 우리 동네 독립운동 유적지 찾기: 의외로 우리가 사는 동네 곳곳에 독립운동의 흔적이 남아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사이트나 각 지자체 홈페이지를 통해 우리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나 관련 사적지를 찾아보고, 직접 방문하여 그분들의 넋을 기리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활동입니다.
[사례 연구] 역사 탐방이 바꾼 한 가족의 광복절 제가 운영하는 역사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이 가족은 매년 광복절을 '그냥 쉬는 날'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제 추천으로 광복절에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방문했습니다.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아이가 유관순 열사가 갇혔던 여옥사,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문당했던 고문실 등을 직접 보면서 점차 표정이 숙연해졌다고 합니다. 집에 돌아온 아이는 그날의 경험을 그림일기로 남겼고, 다음 해 광복절에는 스스로 먼저 "아빠, 우리 태극기 달아야죠!"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직접 보고 느끼는 역사 체험은 아이들에게 살아있는 교육이 되며, 광복절의 의미를 가슴에 새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광복절 관련 자주 묻는 질문
Q1: 광복절과 3.1절은 어떻게 다른가요?
A1: 광복절(8월 15일)은 1945년 일본으로부터 국권을 되찾은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입니다. 반면, 3.1절(3월 1일)은 1919년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독립을 선언하고 대규모 만세운동을 펼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즉, 3.1절은 독립을 향한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날이고, 광복절은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실제로' 독립을 이룬 날이라는 점에서 가장 큰 차이가 있습니다.
Q2: 북한에도 광복절이 있나요?
A2: 네, 북한에서도 8월 15일을 기념하지만 '광복절'이 아닌 '조국해방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북한은 이날을 김일성이 항일 무장 투쟁을 이끌어 조국을 '해방'시킨 날로 선전하며 김일성 개인의 업적을 강조하고 체제 선전에 활용합니다. 우리처럼 민족 전체의 독립투쟁을 기리는 광복절과는 그 의미와 성격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Q3: 광복절은 왜 '공휴일'인가요?
A3: 광복절이 공휴일인 이유는 단순히 쉬는 날을 제공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할 당시, 광복절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경축하고,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 국권을 회복한 민족의 가장 기쁜 날로서 그 역사적 의미를 전 국민이 함께 기리고 기념하기 위해 공휴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모든 국민이 경축 행사에 참여하고 광복의 의미를 되새길 시간을 갖도록 한 것입니다.
Q4: 광복절에 '임시공휴일'이 추가로 지정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A4: 때때로 정부는 광복절 전후로 임시공휴일을 지정하기도 합니다. 이는 주로 침체된 내수 경기를 활성화하고 국민들의 휴식과 재충전을 돕기 위한 경제적, 사회적 목적이 큽니다. 광복절이라는 역사적 경축 분위기와 연휴를 결합하여 국민적 단합을 도모하고 소비를 진작시키는 효과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는 광복절 본연의 의미와는 별개의 정책적 결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5: '빛을 되찾았다'는 '광복'의 한자 의미는 무엇인가요?
A5: '광복(光復)'은 한자 그대로 '빛 광(光)' 자와 '회복할 복(復)' 자를 씁니다. 여기서 '빛(光)'은 단순히 밝음이 아닌, 빼앗겼던 나라의 주권, 민족의 존엄성,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상징합니다. '회복(復)'은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광복'은 어둠에 잠겨 있던 우리 민족이 스스로의 힘과 투쟁으로 잃어버렸던 모든 빛나는 가치들을 되찾았다는 매우 주체적이고 자랑스러운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결론: 끝나지 않은 광복, 우리가 완성해야 할 역사
지금까지 우리는 광복절이 단순히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이라는 1차원적 의미를 넘어, 우리 민족의 주체적인 노력으로 '빼앗긴 빛을 되찾은' 위대한 날임을 살펴보았습니다. 35년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독립의 불꽃, 그리고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환희의 순간까지, 광복의 역사는 선조들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로 쓰였습니다.
이제 광복절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올바른 태극기 게양과 같은 작은 실천에서부터, 독립기념관이나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아 그날의 역사를 직접 느끼고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는 노력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습니다. 광복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에는 아직 남북 분단이라는 아픔이 남아있기에, 광복절은 우리에게 과거의 완성이 아닌 미래의 과제를 제시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광복'은 평화로운 통일을 통해 하나 된 조국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깁니다. 다가오는 광복절에는 잠시 시간을 내어,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가 결코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 아님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하루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